"여자가 남자에 비해서 성취욕구가 낮은 편이지 않나?"
그 순간 복지정책 교수님에 대한 기대가 깨졌다. 전공 수업에서 처음으로 던진 나의 질문에 교수님이 입을 열기 전 잠시 침묵이 흘렀다. 평소에 나는 전공수업의 질문과 답이 핑퐁같다고 생각했다. 많은 질문은 "교수님, 제가 이렇게 관심이 많답니다. 제 이름 기억하세요."처럼 들렸다. 어떤 질문에도 교수님들은 막힘없이 답했다. 나는 그 게임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대학 내내 '공무원스러운' 강의실 분위기가 싫었다.
나는 행정학개론을 두번이나 C+ 맞을 정도로 전공에 무관심했다. 전공시간에 던진 나의 첫 질문은 '왜 그 회의에 여자가 없냐'는 것이었다. 그 날의 강의 주제는 '유연한 고용정책'이었다. 교수님은 유럽 내 성평등지수가 상위권인 핀란드 같은 국가에서는 주3일근무제 같은 정책을 시행한다고 했다. 짧은 영상에서는 고용정책을 통한 성평등을 논의하는 회의가 진행중이었다. 교수님은 영상을 끊고 아주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나는 많은 학우들처럼 끄덕일 뻔 했다. 그런데 그 회의에는 여성이 없었고, 여성 배제적인 방식의 성평등에는 브레이크를 걸고 싶었다. 내 질문에 대해 교수님은 잠깐 생각하더니 여자의 성향이 소극적이라 '끝'까지 올라가는 여성이 적다고 하셨다. 그 날 이후 교수님께 인사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일이다. 영어선생이 수업시간에 '빨래판에 건포도'라며 아내의 가슴에 대해 불평했고, 교복을 입은 내 친구를 뒤에서 '쭉쭉빵빵'이라고 평가했다. 도서관에서 자위를 하다가 잠시 징계를 받은 경제선생님도, 여학생들이 다리를 벌리면 하얀 팬티가 마치 폭포처럼 보인다는 국사 선생님도 있었다. 우리가 졸업한 후 경제선생은 학교로 복직했고, 국사선생은 교감선생이 되었다.
하루는 모여있는 몇명의 아이들에게 '교육부에 찌르면 안되냐'고 했다. 누군가 우리 학교 쌤들이 교육부 사람들이랑 친분이 있어 효과가 없다고 했다. 우리반 친구 중에는 그 학교 선생의 딸도 있었다. 우리는 정작 선생님들 앞에서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들을 꼬박꼬박 선생님이라 불렀고, 가끔 미간을 찌푸리며 징그럽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졸업식 날에는 여자가슴 얘기를 하던 영어 선생 차에 똥을 뿌리고 싶었으나 생각뿐이었다. 소심해서. 혹은 대학 입학뽕에 취해서. 그건 이제 더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었거든.
교수님의 '성취욕구' 발언에 덮어둔 염증이 재발했다. 그쯤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졸업한 고등학교 대나무숲을 보았다. 이상한 선생님들이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친분을 핑계로 사제 간 선을 넘는 분위기도 그대로였다. 아찔했다. 내가 고등학생이 다시 되어 "국사선생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시냐, 경제선생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영어시간에 가슴얘기 하는거냐고" 질문했다면 달라질까. 책상에 앉아있을 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늘 침묵한 건 아니었다. 욱해서 "폭력 없는 학교"가 적힌 팻말을 들고 전교부회장 선거에 나가기도 했다. 나를 까대는 선생들의 언행에 나는 언제나 표정관리를 하지 못했다. 나는 일부 선생의 미움을 샀다. 체벌은 예삿일이고 복도에서 발로 차이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고 뺨을 맞은 적도 있었다.
그들 그룹에 있었던 내 고1 담임이 내 학생기록부에 '거짓말을 자주 합니다'라고 써놓았던 것이 떠올랐다. 선생들이 교무실에서 나 같이 튀는 학생들 뒷담까던 순간도 생생하다. 야자 첫 시간에 친구 생일파티하려고 도망간 적이 있었거든.
나는 선생님을 징그러워하는 속내를 숨기고 부탁을 했다. 그 순간 내가 그 기록을 못 볼거라 생각했던 선생님도 당황했지만, 대학 가려고 부탁하는 입장도 당혹스러웠다. 다시 돌아가도 내가 손해볼까봐 따지긴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여러 이유로 침묵했고, 언니가 되어도 달라진 건 없었다. 하지만 언니들이 침묵하면 동생들이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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